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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축구 레전드 선수

그라운드의 마지막 로맨티스트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by 방글이파더 2023. 3. 9.

그라운드의 마지막 로맨티시스트 가브리엘 바티스투타

2002년 한일 월드컵 아르헨티나와 스웨덴의 F조 마지막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리고 가브리엘 바티스투타는 필드 밖 벤치 앞에 쭈그리고 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다 본인의 마지막 월드컵이자 대회 우승후보 0순위 무엇보다 심각한 경제난으로 절망에 빠져있는 아르헨티나 국민들을 위해 축구로나마 위로하고자 했던 그의 바람은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렇게 그라운드의 마지막 로맨티시스트이자 스트라이커의 교과서로 불리는 바티스투타의 마지막 월드컵은 막을 내렸다...

아르헨티나 국가대표 시절 바티스투타

<프로필>

이름: Gabriel Omar Batistuta

생년월일: 1969년 2월 1일

국적: 아르헨티나

신체: 185CM / 73KG

포지션: 스트라이커

<선수 커리어>

국가대표: 78경기 56골

월드컵 3회(1994년 미국 월드컵, 1998년 프랑스 월드컵, 2002년 한일 월드컵)

코파 아메리카(1991년, 1993년, 1995년)

프로 커리어

CA 뉴웰스 올드보이(1987년 ~ 1989년)

CA 리버 플레이트(1989년 ~ 1990년)

CA 보카 주니어스(1990년 ~ 1991년)

ACF 피오렌티나(1991년 ~ 2000년)

AS로마(2000년 ~ 2003년) → 2003년 인테르 밀란 임대

알 아라비 SC(2003년 ~ 2005년)

90년대 후반과 2000년대 중후반 세계 4대 미드필더 세계 4대 스트라이커 등 각 포지션별 특출 난 선수들의 평가를 많이 했던 시기이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을 앞두고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세계 축구 전문가 및 팬들은 세계 4대 스트라이커라는 스포트라이트를 집중시켰고 브라질의 축구황제 호나우도, 잉글랜드 캡틴 앨런 시어러, 네덜란드의 퍼스트 터치 장인 베르캄프, 마지막 한 명이 오늘 소개해드릴 선수 공포의 7 공주 시절 세리아 A를 호령했던 바티골 바티스투타였다

CA 뉴웰스 올드보이 / CA 리버 플레이트 / CA 보카 주니어스

이른 나이 유럽진출에 성공한 바티스투타의 아르헨티나 리그 경력은 그리 길지도 많은 골을 폭발시킨 시기도 아니었다

뉴웰스 올드보이에서 첫 커리어의 시작을 알렸고 데뷔 시즌 리그 7골을 넣으며 차세대 아르헨티나 골잡이의 면모를 모여주며 이듬해 아르헨티나 최고 명문 클럽 리버 플레이트로 이적하게 된다

하지만 리버 플레이트에서 주전 경쟁에 밀리며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했고 다음시즌 무려 또 다른 최고 명문이자 리버 플레이트의 영원한 라이벌 보카 주니어스로 이적하게 된다

보카 주니어스 이적 후 전반기 역시 본 포지션인 스트라이커가 아닌 윙백, 세컨드 스트라이커 등 자신과 맞지 않는 포지션에 뛰며 여전히 좋은 기량을 보여주지 못했지만 리그 후반기 성적부진으로 감독 교체 우루과이 출신의 명장이자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을 두 번(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이나 울렸던 타바레스 감독이 취임하며 바티스투타를 최전방 스트라이커로 투입 바티스투타의 진가가 발휘하기 시작한다 리그 후반기에만 11골을 넣으며 아르헨티나 국가대표팀으로 선발 1991년 코파아메리카 대회에 참가하며 유럽 스카우터들의 눈에 뜨였고 결국 이탈리아 피렌체의 피오렌티나로 이적하게 된다  

ACF 피오렌티나

바티골 바티스투타를 상징하는 애칭이지만 바티골이 정확히 언제 표현됐는지 알 수는 없다

골잡이로서의 명성을 얻기 시작한 보카 주니어스 시절인지 전성기 피오렌티나시절 생긴 애칭인지 의견이 나뉘고 골을 너무 잘 넣어서 이름옆에 바티골을 붙인 건지 아니면 반박자 빠른 슈팅으로 해설자가 이름을 부르기도 전에 골을 넣어 바티골이라 불리는지 자세 히 알 수 없지만 그라운드를 누비며 기관총 세리머니를 하는 바티스투타를 보면 바티골이라는 애칭이 왜 찰떡인지 알 수 있다 

269경기 167골 피오렌티나에서 선수 생활 전성기이자 프로 커리어 대부분을 보낸 9 시즌 간 기록이다 이 위대한 기록이 더 위대한 이유는 단순 골만 많이 넣은 선수가 아닌 매 시즌 피오렌티나를 너무 사랑하고 피오렌티나를 위해 헌신했던 히스토리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이적 후 첫 두 시즌 간 매년 10골 이상 기록하며 세리아 A 적응기간 없이 순조롭게 유럽 커리어를 쌓아가던 중 92~93 시즌 팀이 세리아 B로 강등되고 만다 당연하게도 팀의 최고 스타이자 리그 최고 스트라이커로 적응기를 마친 바티스투타를 영입하려 여러 명문 구단들의 영입설은 끊이지 않았고 선수 본인도 다가오는 1994년 미국 월드컵을 위해 분명 1부 리그에서의 경쟁력을 보여줘야 했던 중요한 시즌이었다 하지만 바티스투타는 팀이 힘들 때 떠나지 않는 의리를 보여주며 주급 삭감까지 감행하며 피오렌티나에 잔류 피오렌티나 팬들을 감동시켰다 그리고 시작된 세리아 B 시즌 우승을 차지하며 한 시즌만에 팀을 세리아 A로 복귀시키며 피오렌티나 팬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게 된다

세리아 A로 복귀한 94~95 시즌 포르투갈의 천재 미드필더 후이 코스타가 같은 팀 동료로 이적해 왔고 이 시즌 바티스투타는 후이 코스타와 좋은 호흡을 보이며 리그 11경기 연속골 등 총 26골을 폭발 커리어 첫 리그 득점왕에 등극하게 된다

95~96 시즌 리그 15경기 무패 등 리그 4위로 마치며 피오렌티나를 세리아 A 강호로 올려놓았고 코파이탈리아 결승에서 AC밀란을 꺾으며 이적 후 첫 번째 우승컵을 들게 된다 이후 1999년 FIFA 올해의 선수 3위를 차지하는 등 본인은 매 시즌 리그 20골 이상을 기록 팀은 세리아 A 7 공주의 한축을 담당하는 강팀으로 만들며 피렌체에 바티스투타 동상을 만들어 놓을 정도로 팬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여전히 리그 우승을 하기엔 2% 부족한 전력이었다 그러던 중 영원할 것만 같았던 바티스투타와 피오렌티나의 동행은 마무리가 되는데

AS 로마

내가 축구를 보기시작한 90년대 후반은 국내에 해외축구리그 영상을 보기 어려운 시기였고 이따금 유선방송에서 세리아 A 하이라이트를 보여줬던 기억이 난다 당시 세리아 A  우승이 챔피언스리그 우승보다 힘들다고 할 정도로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이탈리아 리그에서 활약했지만 무리한 선수영입과 미숙한 구단 운영으로 하나둘 강팀들이 재정 위기를 겪기 시작했고 파산하기도 하는 격동의 시기였다

다시 본론으로 넘어와 00~01 시즌 젊은 황제 토티를 앞세운 AS 로마는 바티스투타를 강력히 원했고 피오렌티나 역시 엄청난 재정위기를 겪고 있었다 그로 인해 피오렌티나는 결국 팀의 상징인 바티스투타를 당시 한화 400억 원의 금액으로 AS 로마에 이적시키고 만다 비록 구단의 재정위기가 가장 큰 원인이었지만 선수 본인 역시 리그 우승에 대한 갈증이 있었고 AS 로마 이적 당시 피오렌티나 팬들에게 피오렌티나를 너무 사랑하지만 리그 우승이 너무 하고 싶다는 말을 남기며 아쉬운 작별을 하고 만다

파비오 카펠로 감독이 이끄는 로마 첫 시즌 사무엘, 카푸, 에메르손, 토마시, 나카타, 몬텔라, 토티 등 공수 양면의 탄탄한 스쿼드를 보유했으며 바티스투타 역시 리그 20골을 기록하며 수도 로마에 연고를 둔 더비 라이벌 라치오와 90년대 후반 세리아의 절대강자 유벤투스 제치고 AS 로마의 역사적인 18년 만의 우승이자 통산 세 번째 스쿠테토 들어올렸다(이후 현재까지 리그 우승이 없는 로마...) 또 한 이 시즌 피오렌티나와의 이적 후 첫 경기에서 골을 넣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며 전 세계 축구팬들은 그라운드의 로맨티스트라는 애칭을 붙여주기도 했다

첫 시즌 본인 커리어 처음이자 마지막 리그 우승을 달성한 바티스투타는 다음 시즌 기대와 달리 잦은 부상화 노쇠화 등으로 예전 같은 스코어러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고 로마 마지막 03 시즌 중반 인터밀란으로 임대를 갔으나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하고 화려했던 세리아 A 생활을 마무리했다

이 후 카타르 리그 알 아라비로 이적 이적 첫 해 득점왕에 오르며 클래스가 살아있음을 보여주며 2005년 화려했던 선수생활을 마무리하게 된다 

피오렌티나와의 경기 골을 성공시키고 눈물을 보이는 바티스투타

국가대표

78경기 56골 경기대비 골수가 증명하듯 메시 이전 아르헨티나 A매치 최다 득점자이며 아르헨티나의 2021년 코파아메리카 우승 전 아르헨티나의 마지막 메이저 우승대회인 1993년 코파아메리카 우승을 이끈 주역이기도 하다

코파아메리카(1991년 1993년 1995년)

총 3번의 코파아메리카 출전 2번의 우승을 이끌었다

1991년 대회 6경기 6골 대회 득점왕과 MVP에 오르며 우승 1993년 대회 준결승 1골 멕시코와의 결승전 2골을 넣으며 연속 우승을 차지한다 1995년 4골로 대회 득점왕에 올랐으나 8강 숙명의 라이벌 브라질과 2-2 접전 끝 승부차기 2-4 패배로 탈락의 아쉬움을 삼켜야 했다 

1994년 미국 월드컵

남미 예선 홈에서 콜롬비아에 0-5라는 참패를 당하기도 했지만 코파아메리카에서의 연속된 성공으로 기대를 모으며 마라도나, 레돈도, 카니자, 시메오네 등과 참가한 첫 번째 월드컵 조별예선 1차전 그리스전 헤트트릭을 포함 대회 4골을 넣으며 분전했지만 대회 기간 마라도나의 도핑 테스트 결과 양성 반응으로 중도 퇴출당하는 어수선한 분위기가 이어졌고 16강전 게오르게 하지가 이끄는 다크호스 루마니아를 만나 2-3패 하며 탈락하고 만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바티스투타를 주축으로 팀을 재정비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 은메달 주역들이 주축 선수로 성장하며 참가했던 두 번째 월드컵 H조 세 팀(일본, 크로아티아, 자메이카)이 월드컵 첫 출전이라는 다른 우승후보들과 비교해 비교적 수월한 조에 속하며 3전 전승 16강에 올랐으며 바티스투타는 2차전 자메이카전 헤트트릭을 달성 월드컵 역사상 두 대회 연속 헤트트릭을 달성하는 최초의 선수가 되기도 한다

16강 포클랜드 전쟁, 마라도나의 신의 손 사건등 외교적, 축구적으로 절대 앙숙인 잉글랜드와 맞붙게 되는데 대회 최고의 명승부중 하나로 기억될만한 치열한 접전의 연속이었다 바티스투타의 PK 선제골 원더보이 오웬의 환상적인 솔로 골 아르헨티나의 완벽한 FK 약속된 플레이의 골 베컴의 퇴장등 여러 가지 이야깃거리가 가득한 경기였고 연장 종료 2-2 결국 승부차기 끝에 4:3 승리를 거두며 8강에 올라간다

8강전 상대는 거스 히딩크 감독의 네덜란드 16강전 못지않은 명승부를 또 한 번 만들었지만 1-1 동점 정규시간 종료를 얼마 안 남긴 상황  베르캄프의 완벽한 퍼스트 터치 후 수비를 제쳐내며 만들어낸 대회 최고의 골 중 하나를 성공시키며 1-2 패배 2번째 월드컵을 마무리하게 된다

2002년 한일 월드컵

커리어 마지막이자 세 번째 월드컵을 앞둔 아르헨티나는 전 대회 우승팀 프랑스와 함께 강력한 우승 후보 0순위로 뽑혔다 남미 예선을 가볍게 통과하며 막강한 전력을 과시했으며 프랑스 월드컵 이후 세계적인 플레이메이커로 성장한 베론을 필두로 공수 양면의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막강한 스쿼드의 팀이었다

비록 대회 죽음의 조(잉글랜드, 나이지리아, 스웨덴)에 속했지만 누구도 아르헨티나의 조별 탈락을 예상하는 이는 없었다 더군다나 당시 아르헨티나는 경제는 국가 파산위기에 몰리는 등 엄청난 위기를 겪고 있었고 선수들은 절망적인 아르헨티나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정신무장까지 완벽한 상태로 대회에 참가한다

첫 경기 나이지리아전 바티스투타의 헤딩골로 1-0 승리하며 경기내용은 만족스럽지 못했지만 비교적 좋은 스타트로 대회를 시작했으나 전 대회 에이어 또다시 만난 숙적 잉글랜드전 당대 최고의 축구스타 베컴의 PK골로 0-1 패배를 기록하며 마지막 스웨덴전 꼭 승리가 필요한 상황이 되었다 스웨덴과 비길경우 나이지리아가 잉글랜드에 대승을 거둬야 하는 복잡한 상황에 놓여지게 됐지만 그 어느 누구도 아르헨티나의 조 예선 탈락을 의심하는 이는 없었다 하지만 꼭 이겨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인지 바티스투타를 비롯 아르헨티나 선수들은 졸전을 거듭하며 0-1 리드 당한채 크레스포의 막바지 동점골로 1-1 무승부를 거두며 조별예선을 탈락하고 만다(나이지리아와 잉글랜드는 0-0으로 비기며 경기 마무리) 

결국 바티스투타 본인의 3번의 월드컵 기간 동안 2 대회 연속 헤트트릭등 총 10골을 기록 화려한 개인기록과는 반대로 우승은 고사하고 4강 진출도 한번 못한 채 월드컵 커리어를 마무리했으며 2002년 한일 월드컵 이후 국가대표 경력 또한 마무리하게 된다

글을 마치며

보기만 해도 강력한 슈팅으로 상대 골망을 흔드는 모습을 보면 속이 뻥 뚫리는 짜릿함을 주는 공격수였던 바티스투타 정통형 스트라이커를 찾기 힘든 요즘 시대 너무나 완벽했던 9번 스트라이커이자 스트라이커의 교과서로 불린 완벽한 타깃터형 공격수 전성기 시절 피오렌티나가 아닌 전력이 더 강한 팀으로 이적해 좋은 팀메이 트 와 함께했다면 본인 스탯은 물론 우승커리어 역시 더 화려했을 것이다 돈과 명예만 좇는 선수들이 즐비한 요즘시대에 피오렌티나에 보여줬던 헌신과 사랑이야 말로 과거의 축구팬들이 오늘날 바티스투타를 그리워하고 더 오래도록 기억하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