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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축구 레전드 선수

노쇠화된 전차군단의 암흑기를 홀로 지탱한 리틀 카이저 미하엘 발락

by 방글이파더 2023. 3. 8.

노쇠화된 전차군단의 암흑기를 홀로 지탱한 리틀 카이저 미하엘 발락

유로 2008 결승전 6월 29일 오스트리아 빈의 에른스트 하펠 경기장 종료 휘슬이 울리고 스페인 선수들은 환호성을 독일 대표팀 주장 발락은 고개를 떨구며 2번째 준우승 트레블의 아픔을 삼키게 된다 2번의 준우승 트레블(레버쿠젠 소속 01~02 분데스리가, 챔피언스 리그, 2002 한일 월드컵, 첼시 소속 07~08 프리미어리그, 챔피언스 리그, 유로 2008 준우승) 발락을 대표하는 경력이자 이인자 선수로 각인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독일 국가대표 시절 발락

<프로필>

이름: Michael Ballack

생년월일: 1976년 9월 26일

국적: 독일

신체: 185CM / 85KG

포지션: 중앙 미드필더

<선수 커리어>

국가대표 98경기 42골

월드컵 2회(2002년 한일 월드컵, 2006년 독일 월드컵)

UEFA 유로(유로 2000, 유로 2004, 유로 2008)

프로 커리어

켐니츠 FC(1995년~1997년)

FC 카이저슬라우텐(1997년~1999년)

바이어 04 레버쿠젠(1999년~2002년)

FC 바이에른 뮌헨(2002년~2006년)

첼시 FC(2006년~2010년)

바이어 04 레버쿠젠(2010년~2012년)

 

탄탄한 피지컬에서 나오는 파워풀한 중거리 슛 능력, 타점 높은 헤딩, 박스 안 침착한 마무리 능력 등 미들라이커의 표본이자 완성한 활동량을 바탕으로 한 수준급 태클 능력을 겸비한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 이기도한 발락은 1995년 독일 동부에 있는 주 작센의 FC 켐니츠에서 첫 프로 커리어를 시작한다 그 후 1997년 FC 카이저슬라우텐으로 이적 첫 2 시즌은 2부 리그에서 보냈으나 1999년 3월 레버쿠젠과의 경기에 분데스리가 데뷔전을 치렀다 주로 수비적인 역할을 맡았던 발락은 분데스리가 데뷔 시즌 우승의 기쁨을 맛보기도 했으며(이 우승은 전 시즌 2부 리그 승격팀이 1부 리그 승격 후 바로 우승한 첫 번째이자 현재까지 분데스리가 역사상 깨지지 않는 기록이다) 이후 본인의 분데스리가 데뷔 상대였던 레버쿠젠으로 이적을 하게 된다

 

바이어 04 레버쿠젠

카이저슬라우텐에서 주로 수비적인 역할을 맡았다면 레버쿠젠에서는 좀 더 공격적인 롤을 맡으며 전 세계적으로 발락이라는 이름을 알리는 시기이다 

제 호베루트, 루시우, 베르튼 슈나이더, 베르바토프 등 수준급 동료들과 발을 맞춘 발락은 레버쿠젠 마지막 시즌 리그에서만 29경기 17골이라는 엄청난 결정력을 자랑했으며 이 기록은 본인 선수생활 중 리그 최다 득점이기도 하다 하지만 커리어 최다 득점에도 불구 발락에게는 불명예스러운 기록을 남긴 시즌이기도 한데 이인자라는 수식어가 붙은 준우승 트레블의 첫 번째 경력이기 때문이다

얀 콜러, 로시츠키가 활약한 도르트문트에게 분데스리가 우승을 내주며 리그 2위를 기록 챔피언스 리그 결승에서 갈락티코 1기 레알 마드리드를 만나 역대 챔피언스 리그 최고골 중 하나로 회자되는 지단의 발리슛으로 2대 1 무릎을 꿇고 준우승에 그치고 만다 레버쿠젠 전력상 4강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꺾는 등 결승진출은 분명 엄청난 성과이기는 하나 선수 생활 내내 본인이 그토록 원하던 챔피언스 리그 타이틀을 획득하지 못한 아쉬움을 남긴 준우승이었다

지단의 그 유명한 발리 결승골 운명의 장난처럼 뒤에서 지켜보는 발락

 

FC 바이에른 뮌헨 

레버쿠젠과 2002 한일 월드컵의 활약으로 발락의 가치는 높아졌고 당연하게도 빅클럽 이적설이 끊이지 않았다

뮌헨으로 이적 당시 레알과 뮌헨이 발락을 강력히 원했고 발락은 자국에서 열리는 2006년 독일 월드컵을 위해 자국팀인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을 선택한다

이 당시 발락은 독일과 뮌헨의 명실상부 최고의 아이콘이자 분데스리가와 독일을 대표하는 공격형 미드필더였다

프랑스의 지단, 이탈리아의 토티가 있다면 독일은 단연 발락이었고 발락 역시 국대와 뮌헨에서 승승장구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아갔지만 이 당시 분데스리가는 전체적으로 침체기를 겪으며 유럽대항전에서 힘을 쓰지 못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올리버칸, 리자라쥐, 샤놀, 데미첼리스, 루시우, 살리하미지치, 마카이, 피사로, 다이슬러, 하그리브스, 제 호베루트, 루시우 등 공수 양면으로 탄탄한 스쿼드를 자랑하며 4 시즌 간 분데스리가, DF포칼 총 3번의 더블을 달성하며 독일 내의 우승타이틀은 모두 수집했지만 정작 본인이 그토록 원하던 챔피언스 리그 우승타이틀은 획득하지 못했고 이 시기 발락은 챔피언스 리그 타이틀을 얻기 위해 해외리그 이적을 결심한다

바이에른 뮌헨 4 시즌 간 챔피언스 리그 결과

02-03 시즌 조별리그 탈락

03-04 시즌 16강 VS 레알 마드리드(지네딘 지단, 루이스 피구, 호나우도, 라울, 카시야스의 갈락티코 1기 시절)

1차전(홈) 1-1 무승부 2차전(원정) 0-1 패배

04-05 시즌 8강 VS 첼시(프리미어리그 단 1패만 기록하며 리그 우승을 차지한 무리뉴 첼시 1기 시즌)

1차전(원정) 2-4 패배 2차전(홈) 2-3 패배

05-06 시즌 16강 VS AC 밀란(철의 4백, 카카, 세브첸코, 시도르프, 피를로 등 유럽 최강 스쿼드를 자랑했던 AC 밀란)

1차전(홈) 1-1 무승부 2차전 1-4 패배

(1차전 홈에서 넣은 발락의 중거리슛은 당시 축구팬들 사이에서는 인간탈피슛으로 불리며 뮌헨 시절 발락을 대표하는 골이기도 하다)

첼시 FC

05-06 시즌 종료 후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위해 이적을 결심한 발락에게 인터밀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첼시 등 세계 빅클럽들의 영입설은 끊이지 않았고 러시아 석유재벌 로만 아브라모비치의 자금력을 바탕으로 프리미어리그 2연패를 달성한 강력한 스쿼드의 첼시를 선택 본인 커리어 처음이자 마지막 해외진출을 하게 된다

하지만 무리뉴 감독은 정작 발락을 원하지 않았고 구단주 아브라모비치의 강력한 요구로 인한 영입이었으며 당시 세계 최고의 미들라이커이자 첼시의 상징과도 같은 램파드의 존재는 발락과 램파드의 공존이 가능할지 의문이 되는 이적이기도 했다

첼시에서의 4 시즌 발락 본인이 뮌헨에서 했던 공격형 미드필더 역할은 첼시 에이스 램파드가 담당이었고 발락은 램파드를 보좌하며 박스 투 박스 혹은 수비형 미드필더로서의 역할을 맡으며 뮌헨시절의 강력한 포스와 많은 공격 포인트를 생산해내진 못했지만 프리미어리그 초반 적응에 애를 먹었던 첫 시즌을 제외하면 램파드 - 발락 - 마케렐레, 램파드 - 에시엔 - 발락으로 이어지는 황금 미드필더 라인을 구축 팀의 공수조율과 밸런스를 잡아주며 후방 빌드업을 담당했으며 램파드가 부상으로 결장일 땐 공격적인 롤을 부여받아 중요한 경기 공격포인트를 기록하는 등 공수 양면으로 양질의 활약을 보여주게 된다

하지만 좋은 활약과는 반대로 첼시에서의 타이틀 획득은 쉽지 않았는데 3번 우승한 FA컵과는 달리 07-08 시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마지막라운드까지 리그 우승 타이틀을 놓고 경쟁했으나 승점 2점 차로 준우승에 그치는 등 마지막 09-10 시즌에서야 첫 프리미어리그 우승 타이틀을 획득할 수 있었으며 챔피언스리그 우승 역시 그 시즌 4강에서 첼시의 발목을 잡았던 리버풀을 꺾고 결승진출 또다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만나 1-1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 끝에 패배 두 번째 준우승에 머물러야 했다 그토록 원했던 타이틀이 걸린 결승전 평소와는 다르게 슈팅에 힘이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풀타임 활약 승부차기 키커로 나서 성공시키는 등 분전했지만 끝내 챔피언스리그 우승은 발락을 외면하고 만다

08-09 시즌 새로 부임한 스콜라리 감독의 부진으로 시즌 중 거스 히딩크 감독으로 교체되는 어수선한 상황에도 챔피언스리그 4강에 진출 당시 펩 과르디올라 신인 감독이 이끄는 FC 바르셀로나와 격돌하게 되는데 세계 최고의 선수로 성장한 메시와 사비-이니에스타-부스케츠 역대 최고의 미드필더 트리오의 첫 번째 시즌으로 리그에서 레알을 챔스에서 리옹과 뮌헨을 초토화시켜 버리는 엄청난 포스를 자랑했지만 첼시와의 4강전만큼은 램파드-에시엔-발락 미드필더 라인의 조직력과 기동성에 완패하며 2차전 1-0으로 리드 결승진출을 눈앞에 두었지만 경기 종료직전 이니에스타의 동점골로 원정 다득점에 앞선 바르셀로나가 결승전에 진출하게 된다 이 경기는 경기 외적으로 경기 내내 주심의 석연찮은 판정으로 첼시팬들의 분통을 사는 경기였으며 경기 종료직전 바르셀로나 박스 안 발락의 슈팅이 에투의 팔에 맞아 핸드볼 상황이었으나 끝내 주심은 외면 심판 판정에 불만을 품은 발락이 주심을 쫓아가며 격렬히 항의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으며 경기 종료 후 드로그바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카메라를 향해 분노를 표출하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두 시즌 연속 같은 리그 같은 팀(맨유)들의 결승전을 치르지 못하게 하기 위해 조작했다는 얘기가 흘러나올 정도로 첼시는 바르셀로나보다 좋은 경기를 하고도 탈락하는 아쉬움을 삼키고 만다  

결국 발락은 끝내 챔피언스리그 타이틀을 획득하지 못한 채 09-10 시즌을 끝으로 첼시와 계약연장 조건 의견차를 좁히지 못하고 원 소속팀 레버쿠젠으로 복귀하게 된다 레버쿠젠 복귀 후 잦은 부상으로 인해 큰 활약을 하지 못하고 2012년 10월 현역 은퇴를 하게 된다

국가대표

98경기 42골 경기당 0.5골에 육박하는 엄청난 골 결정력에서 알 수 있듯이 발락의 독일 국가대표 영향력은 어마어마했으며 주요 메이저대회에 참가 녹슨 전차군단을 이끌고 예상외의 좋은 성적을 내기도 했지만 끝내 국가대표 메이저 타이틀 획득마저 실패하고 만다

2002 한일 월드컵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뜨거웠던 여름 2002년 월드컵 진출을 위해 역대 최약체로 꼽히는 독일대표팀 주축으로 참가 4강전 대한민국을 상대 결승골을 포함 대회 총 3골을 넣으며 팀을 결승에 진출시키지만 정작 본인은 4강전 이천수선수에게 가한 태클로 옐로카드를 받으며 경고누적 결승전을 뛰지 못하고 벤치에서 브라질의 우승을 지켜봐야만 했다

2006 독일 월드컵

통일 독일 이후 동독출신 첫 번째 주장으로 출전하게 된 두 번째 월드컵 자국에서 열리는 월드컵이지만 여전히 우승후보 전력에 못 미친다는 우려와는 달리 프링스와의 강력한 중원 호흡을 보이며 대회전 부상으로 개막전 불참을 제외 조별예선 2라운드부터 4강 세미 파이널까지 풀타임 활약했지만 팀은 끝내 이탈리아 징크스를 극복하지 못하고 연장 접전 끝 0-2 패배로 대회를 마무리하게 된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당시도 독일대표팀 주장이자 본인 커리어 마지막 월드컵 출전이 확실하였으나 포츠머스와의 FA컵 결승전 부상으로 결국 참가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기기도 했다 

유로 2000, 2004, 2008

후보로 참가한 유로 2000 마지막 포르투갈전 교체출전으로 팀의 조별리그 탈락과 함께 대회를 마무리했으며

주축으로 참가한 유로 2004 대회에서는 체코와의 조별리그 마지막 경기 환상적인 발리골을 기록하기도 했지만 팀은 2 연속 대회 졸전을 거듭하며 탈락 두 번째 유로대회 역시 조별리그 탈락의 수모를 겪여야 했다

커리어 마지막 유로대회이자 독일 월드컵과 동일한 캡틴으로 참가한 유로 2008 대회 조별리그 마지막 오스트리아전 말도 안 되는 환상적인 프리킥 골(새벽에 생중계로 경기를 시청했는데 졸면서 보는 중 이 골을 보고 잠이 확 깨기도 했다)을 포함 8강전 우승후보 포르투갈전 헤딩골을 넣는 등 팀을 이끌며 결승에 진출했으나 끝내 스페인의 벽을 넘지 못하고 0-1 패배 본인 커리어 두 번째 준우승 트레블로 아쉽게 대회를 마무리하게 된다 

글을 마치며

분명 2번의 준우승 트레블은 많은 축구팬들로 하여금 발락이 챔피언이 아닌 영원한 이인자 선수라고 생각하게 한다

하지만 선수 커리어 동안 리그, FA컵 등 우승을 한 번도 못해보고 은퇴하는 선수들이 대부분인 현실에서 발락은 분데스리가, 프리미어리그, 잉글랜드 FA컵, DF 포칼 컵 등 수많은 우승 타이틀을 차지한 챔피언이 이기도 하다

축구에 만약은 없지만 발락의 뮌헨시절 가공할만한 공격 포인트와 노쇠화된 전차군단을 홀로 이끌며 보여줬던 압도적인 포스를 기억하는 팬들이라면 두 번의 준우승 트레블중 챔피언스리그 혹은 국가대표 메이저대회 타이틀 하나라도 얻은 발락은 독일의 전설적인 선수 마테우스에 버금가는 평가를 받지 않았을까 지금보다 더 위대한 선수로 기억되지 않았을까 생각하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