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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축구 레전드 선수

게으른 천재이자 1994년 월드컵 우승의 주역 호마리우

by 방글이파더 2023. 3. 14.

게으른 천재이자 1994년 월드컵 우승의 주역 호마리우

1993년 ~ 1994년 스페인 라리가 바르셀로나 vs 레알 마드리드의 경기는 바르셀로나의 5:0 대승으로 마무리된다 당시 바르셀로나 스트라이커였던 호마리우는 경기 해트트릭을 달성하며 최고의 경기력으로 누 캄푸 팬들의 기립 박수를 받았는데 이 경기는 경기 외적으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세계 3대 축제 중 하나인 브라질 카니발 축제에 가고 싶었던 호마리우는 당시 감독이었던 요한 크루이프에게 시즌 중 축제에 보내달라고 떼를 썼고 당연히 시즌 중 어떻게 축제를 보내줄 수 있냐며 감독은 거절했다

하지만 축제에 안 보내주면 시즌을 치르지 않겠다는 호마리우에게 요한 크루이프 감독은 한 가지 딜을 했고 일요일 레알 마드리드와의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하면 보내준다고 했다 결국 호마리우는 일요일 레알 마드리드와의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달성 카니발 축제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1994년 미국 월드컵 트로피에 입맞춤하는 호마리우

 

<프로필>

이름: 호마리우 지소라 파리아(Romário de Souza Faria)

생년월일: 1966년 1월 29일

국적: 브라질

신체: 168CM / 71KG

포지션: 스트라이커

<선수 커리어>

국가대표: 70경기 55골

월드컵 2회(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1994년 미국 월드컵)

코파 아메리카(1989년, 1997년)

프로 커리어

CR 바스쿠 다 가마(1985년 ~ 1988년)

PSV 아인트호번(1988년 ~ 1993년)

FC 바르셀로나(1993년 ~ 1995년)

CR 플라멩구(1995년 ~ 1996년)

발렌시아 CF(1996년 ~ 1997년) → 1997년 CR 플라멩구 임대

CR 바스쿠 다 가마(2000년 ~ 2002년)

플루미넨스 FC(2002년 ~ 2004년) → 2003년 알 사드 임대

CR 바스쿠 다 가마(2005년 ~ 2006년)

마이애미 FC(2006년) → 2006년 애들레이드 유나이티드 임대

CR 바스쿠 다 가마(2007년)

마라도나가 은퇴하고 축구황제 호나우두가 나오기 전 남미 최고의 선수는 단연 호마리우였다 그 자존심 강한 마라도나 역시 라이벌 국가 선수인 호마리우를 세계 최고의 선수로 치켜세웠으며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의 활약은 1986년 멕시코 월드컵 마라도나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보여주면 월드 챔피언에 올랐다

비록 경기 외적으로 술과 파티를 좋아하고 동료 선수들과 많은 불화설에 휩싸이는 기행으로 선수 생활 내내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경기장 안에서 골 넣는 기술만큼은 가히 천재적이었다 수비수와의 수싸움에 능했으며 그리 힘들 들이지 않고 톡 차서 넣는 칩샷이나 꼬발슛으로 불리는 코볼슛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CR 바스쿠 다 가마

1985년 천부적인 재능에 비해 작은 체격조건 때문인지 생각보다 늦게 프로 무대에 데뷔한다

하지만 호마리우는 브라질 리그에 데뷔하자마자 지역리그 21경기 11골을 넣는 잠재력을 폭발시켰으며 2,3년 차 시즌 브라질 지역리그 득점왕에 오르는 등 총 148경기 80골이라는 엄청난 골을 넣으면서 브라질 축구의 새로운 스타 탄생을 예고한다

그리고 맞이한 1988년 대한민국에서 개최된 서울 올림픽 브라질 대표팀으로 참가 팀은 비록 은메달에 그쳤지만 6경기 7골이라는 엄청난 득점력을 보여주며 유럽 명문 구단의 타깃이 된다 바르셀로나, 레알 마드리드 등 빅 클럽들의 영입제의 속에 호마리우는 생각보다 한 단계 낮은 리그인 네덜란드 리그로 이적하게 되고 거스 히딩크 감독의 지도를 받게 된다

PSV 아인트호번

바르셀로나 이적으로 마음을 굳혔던 호마리우 하지만 당시 아인트호번 감독이었던 히딩크 감독은 호마리우가 올림픽에서 보여준 활약에 매료되어 공항으로 출국 직접 브라질로 날아가 호마리우를 설득하게 된다

전 대회 유럽 챔피언스리그 우승팀이자 히딩크 감독의 절실함에 감동받은 호마리우는 결국 PSV 아인트호번으로의 이적을 결심하게 된다

그리고 시작된 1988년 ~ 1989년 시즌 유럽 이적 첫해이지만 적응기간도 없이 리그 24경기 19골을 기록 득점왕에 등극하며 팀의 리그와 FA컵 더블 달성에 일등공신이 된다 또 한 두 번째 시즌 역시 리그 20경기 23골이라는 경기당 1골이 넘는 결정력을 비롯 챔피언스리그 득점왕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으며 PSV 아인트호번 총 4 시즌 간 109경기 출전 98골을 기록하며 리그 득점왕 세 번 팀의 세 번의 리그 우승과 FA컵 우승을 선물해 주며 스페인의 FC 바르셀로나로 이적하게 된다

FC 바르셀로나

바르셀로나 입단 후 호마리우는 기자회견에서 올 시즌 리그에서 30골을 넣겠다며 호언장담한다

비록 아인트호번에서 보여준 활약으로 유럽 무대에 통한다는 것을 증명했지만 많은 전문가들은 한 단계 높은 수준의 라리가 첫 시즌에 30골을 넣겠다는 호마리우 말에 어리둥절한다

하지만 호마리우는 입단 첫 해 리그 33경기 30골이라는 말도 안 되는 결정력을 보여주며 곧바로 팀의 리그 타이틀 획득 및 라리가 득점왕을 차지하는 엄청난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이 시기 호마리우의 플레이는 아인트호벤 시절보다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었는데 라리가의 많은 수비수들을 쉽게 농락하며 많은 힘을 들이지 않고 쉽게 쉽게 골을 넣는 호마리우 모습에 전 세계 축구팬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리그 타이틀과 별개로 챔피언스리그 결승에서 AC밀란에 0:4 패배 준우승에 그치며 챔피언스리그 타이틀 획득에 실패하며 시즌을 마무리해야 했다

호마리우는 선수생활 동안 최고의 활약과 별개로 연습은 게을리하고 술과 파티를 즐기는 방탄한 삶을 즐기는 선수였다 그런 모습으로 선수 시절동안 많은 감독들과 불화가 있었고 당시 바르셀로나 감독이었던 요한 크루이프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음시즌 기대와 다르게 별다른 활약 없이 리그 13경기 4골이라는 초라한 시즌을 보내게 되었고 호마리우의 프로답지 못한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크루이프 감독과 호마리우의 갈등은 극에 달하게 된다 결국 둘 사이는 회복되지 못한 채 호마리우는 바르셀로나에서 삶이 불행하다는 말을 남기며 조국 브라질로 복귀 바르셀로나에서의 생활을 마무리하게 된다

이후 브라질로 복귀한 호마리우는 임대신분으로 스페인 발렌시아에서 선수생활을 하지만 별다른 활약 없이 조국 브라질로 복귀 커리어 대부분을 브라질 리그에서 활약하며 카타르, 호주, 미국 리그에서 잠시나마 활약하기도 했다 특히 2005년 바스쿠 다 가마 시절 최고령 득점왕 및 2006년 미국 리그 득점왕에 오르는 클래스 있는 모습을 보여주며 2007년 파란만장했던 선수생활을 마무리한다

국가대표

1989년 자국에서 열린 코파 아메리카 대회에 참가 우승으로 가는 중요한 경기였던 우루과이전 결승골을 넣는 등 좋은 활약을 선보이며 셀레상의 40년 만의 대회 타이틀 획득에 큰 기여를 했으며 차세대 축구황제 호나우두와 함께 참가한 1997년 대회에서는 호나우두와 완벽한 신구 조화를 이루며 3골을 넣는 등 커리어 두 번째 코파 아메리카 대회 우승을 차지한다

1994년 미국 월드컵

호마리우 축구 커리어 경력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1994년 미국 월드컵이라고 할 수 있다

1990년 월드컵을 4개월 앞둔 시점 리그에서 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을 당해 회복이 충분히 되지 않은 채 대회에 출전한 호마리우는 커리어 첫 월드컵 한 경기 출전에 그치며 조국의 16강 탈락을 봐야 했던 아쉬움을 뒤로하고 1994년 월드컵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감독과의 불화로 1994년 월드컵 남미 지역예선 중 대표팀에 소집되지 못했지만 예선전 팀의 부진 속에 다시 국가대표팀 부름을 받고 활약 조국을 월드컵 본선에 올려놓는다

대망의 본선대회 호마리우는 베베투와 환상의 호흡을 보여주며 조국 브라질을 우승으로 이끌고 대회 MVP를 수상하게 된다 호마리우는 대회 7경기 동안 결승전을 제외한 모든 경기 공격 포인트를 기록하는 엄청난 활약을 보여주는데 당시의 기록은 아래와 같다

조별예선 3경기(1차전 러시아전 1골, 2차전 카메룬전 1골, 3차전 스웨덴전 1골 기록)

토너먼트 라운드(16강 미국전 결승골 어시스트, 8강전 네덜란드전 1골, 4강전 스웨덴전 1골)

비록 결승전에서 부상에 복귀한 바레시에 막혀 큰 활약을 보이진 못했지만 승부차기 키커로 나와 성공시키는 등 매 경기 순도 높은 활약으로 셀레상의 24년 만의 월드컵 챔피언에 올려놓았으며 그 시즌 바르셀로나에서의 활약을 더해 1994년 FIFA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하는 등 선수로서 최고의 영광을 누리게 된다

 

불운

비록 나이가 들고 유럽에서 선수 커리어를 보내지 않았지만 브라질 리그에서 독보이는 골감각은 여전했고 젊은 황제 호나우두와 좋은 신구조화를 이루며 1998 프랑스 월드컵의 기대감을 높였지만 리그 경기 중 당한 부상으로 1998년 프랑스 월드컵 최종예선 엔트리에 뽑히지 못한다

이후 대표팀에 한동안 뽑히지 못하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브라질은 역대 최악의 월드컵 예선을 치르고 있었는데 주축 호나우두의 장기 부상과 그를 대처할만한 마땅한 스트라이커가 없어 브라질 여론은 호마리우의 대표팀 소집을 강력히 원했고 당시 감독이었던 룩셈부르크 감독은 호마리우를 다시 대표팀에 소집하게 된다 대표팀 소집 후 가진 볼리비아와 베네수엘라의 경기에서 해트트릭과 4골을 넣는 엄청난 활약을 보이며 한일 월드컵 최종 엔트리 기대감을 높였고 당시 브라질 대통령조차도 호마리우의 월드컵 엔트리 발탁을 원했지만 새롭게 부임한 스콜라리 감독은 팀 분위기를 망칠 수 있는 호마리우를 결국 최종 엔트리에 제외하고 만다 

비록 2002년 한일 월드컵은 브라질의 우승으로 막을 내렸지만 준우승을 했던 프랑스 월드컵에 호마리우가 출전해 당시 최 전성기였던 호나우두와 투톱을 이뤄 대회 활약하는 모습을 봤다면 어땠을까 하는 팬들의 아쉬움이 많이 남아있으며 선수 본인 역시 호나우두와 월드컵 챔피언에 오를 기대감이 컸던 만큼 아쉬운 대회로 남아있다

글을 마치며

1994년 미국 월드컵을 한 달여 앞두고 브라질 전역은 엄청난 충격에 휩싸이게 된다 바로 호마리우의 은퇴 선언이었는데 납치범들이 호마리우의 아버지를 납치 호마리우에게 엄청난 몸값을 요구했다 이에 화가 난 호마리우는 곧장 기자회견을 열어 아버지를 풀어주지 않으면 국가대표팀 은퇴 및 1994년 미국 월드컵 참가를 보이콧했던 일화였다 

당연하게도 브라질 최고 스타였던 호마리우의 은퇴 선언에 브라질 대통령 및 정부 갱스터 집단까지 납치범들을 찾는 일이 벌어졌고 이에 기겁한 납치범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호마리우 아버지를 자진 풀어주게 되었다

이 일화는 국내 방송에도 나온 실화이며 이 일화를 바탕으로 알 수 있듯 브라질 국민들이 호마리우에게 걸었던 기대가 얼마만큼인지 그의 실력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프로통산 750골이라는 숫자가 말해주듯 호마리우는 엄청난 스코어러였다 골을 너무 쉽게 넣어 이따금 축구라는 스포츠가 허무하게 느껴질 정도로 모든게 완벽한 스트라이커였지만 자기관리에 조금 더 신경썼다면 술과 파티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면 그의 커리어는 지금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