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스타 로베르토 바조
1994년 미국 월드컵 결승전 브라질과 이탈리아는 월드컵 최초 4회 우승을 위해 격돌했고 양 팀은 득점 없이 무승부로 승부차기에 돌입한다 이탈리아의 주장 바레시와 4번 키커의 실축으로 한점 뒤지고 있는 상황 이탈리아의 5번째 키커 로베르토 바조가 나왔다
골대를 향해 찬 슛은 야속하게도 골문을 외면하며 브라질의 통산 4회 우승으로 막을 내리고 이 승부차기 한 번의 실축으로 이탈리아를 대회 결승까지 이끌었던 바조는 이탈리아 팬들의 외면을 받으며 은퇴할 때까지 승부차기 악몽에 시달려야만 했다 바조만 실축한 것도 아니고 바조가 성공했더라도 다음 브라질 키커가 성공하면 브라질의 우승이었기에 바조에게 빗발치는 질타는 너무나 가혹한 결과였지만 바조에게 거는 이탈리아 팬들의 기대치가 너무 높았기에 바조는 끝내 이탈리아 우승 실패의 원흉으로 찍히게 된다 그렇게 바조는 쓸쓸히 준우승 메달을 목에 걸고 대회를 마감함과 동시에 한동안 이탈리아 대표팀에서도 멀어졌다
<프로필>
이름: 로베르토 바조(Roberto Baggio)
생년월일: 1967년 2월 18일
국적: 이탈리아
신체: 174CM / 73KG
포지션: 세컨드 스트라이커
국가대표(56경기 27골)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1994년 미국 월드컵, 1998년 프랑스 월드컵
프로 커리어
비첸차 칼초(1983년 ~ 1985년)
ACF 피오렌티나(1985년 ~ 1990년)
유벤투스 FC(1990년 ~ 1995년)
AC 밀란(1995년 ~ 1997년)
볼로냐 FC 1909(1997년 ~ 1998년)
인터 밀란(1998년 ~ 2000년)
브레시아 칼초(2000년 ~ 2004년)
경기 중 파워풀한 몸싸움과 강력한 태클이 오고 가는 축구는 가장 치열하고 전투적인 스포츠 중 하나이다 이런 치열한 경기 속 로베르토 바조의 플레이는 마치 다른 세계에서 혼자 플레이하는 우아함과 화려함을 볼 수 있었다
상대적으로 강력한 체격을 바탕으로 한 선수는 아니었지만 순간 가속력과 민첩함으로 수비를 제쳐내며 환상적인 골을 만들어냈고 정확한 킥력을 바탕으로 우아한 골들을 기록하기도 했던 바조 선수 생활 시작도 전인 10대 시절 두 번의 큰 부상으로 선수생활을 포기할뻔했지만 불굴의 의지와 끝없는 투쟁심으로 부상을 이겨내고 세계 최고의 9.5번 선수로 활약했던 로베르토 바조
최고의 선수와 비운의 선수로 평가받기도 한 한 편의 영화 같은 선수시절을 보낸 판타지스타 바조의 커리어를 알아보자
비첸차 칼초, ACF 피오렌티나
유소년 시절부터 큰 두각을 나타낸 바조는 한국나이 17살이라는 나이에 유소년팀 비첸차 칼초에서 프로 무대에 데뷔한다 비록 세리아 C 무대였지만 17살 소년은 프로 무대에서도 큰 두각을 나타내며 1984/1985 시즌 총 12골을 넣으며 팀을 세리아 B로 승격시키며 일약 이탈리아가 주목하는 최고의 스타로 등극한다
하지만 바조는 팀을 세리아 B 무대에 승격 시킴과 동시에 선수 생활 내내 그를 끊임없이 괴롭힐 오른쪽 십자인대 파열이라는 큰 부상을 당하며 첫 번째 축구인생의 큰 고비를 맞이한다 의학 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당시로서는 선수 생명 위기에 봉착한 큰 부상이었었기에 선수생활을 꽃 피기도 전에 선수 생명의 큰 위기를 겪었던 바죠였지만 그런 그의 재능을 알아본 피오렌티나는 부상을 안고 있는 바조를 영입하게 된다 그렇게 피오렌티나로 이적한 바조는 힘든 재활훈련을 통해 1986년 1월 그라운드로 복귀하지만 또다시 무릎 부상이 재발하며 시즌을 마무리하게 된다
10대 후반의 나이에 두 번이나 큰 부상에 시달렸던 바조는 힘든 시기였음에도 그라운드에 복귀하겠다는 의지 하나만으로 버텼고 피오렌티나 역시 그런 바조를 믿고 재활을 돕게 된다 그렇게 힘든 부상을 이겨내고 드디어 피오렌티나 이적 세 시즌만인 87/88 시즌에서야 세리아 A 무대에 자신의 등장을 알린다 복귀와 동시에 팀은 강등위기의 어려운 상황에 놓였는데 바조는 마라도나가 이끄는 당대 최고의 팀 나폴리를 상대로 세리아 A 데뷔골을 넣음과 동시에 시즌 6골을 넣으며 팀을 강등위기에서 구하게 된다
부상을 말끔히 털어내고 완벽하게 시즌을 치른 88/89 시즌 모든 경기 총 40경기 출전 24골을 기록하며 자신을 믿고 기다려준 피오렌티나 구단과 팬들에게 보답하는 활약을 보여주며 피오렌티나의 희망으로 떠오르게 되고 89/90 시즌 리그 17골 득점과 팀을 UEFA컵 결승에 올려놓는 활약을 하지만 결승에서 팀은 유벤투스에게 패배 준우승에 그치며 커리어 첫 번째 우승은 달성하지 못하게 된다
그렇게 피오렌티나에서 좋은 활약을 보여주었기에 피오렌티나 팬들이 바조에게 거는 기대와 사랑은 폭발적이었는데 그런 이탈리아 최고 선수를 당시 세계 최고 이적료 800만 유로에 유벤투스가 영입제의를 해오면서 피오렌티나와의 동행을 마무리하게 된다 자신의 부상을 믿고 기다려준 피오렌티나였기에 바조는 피오렌티나 잔류를 희망했지만 역시나 당시에도 피오렌티나의 재정 상황은 좋지 않았기에 바조를 유벤투스에게 보낼 수밖에 없었고 바조는 그렇게 아쉬움을 머금은 채 유벤투스로 이적하게 된다
유벤투스 FC
유벤투스 이적 후 당대 최고의 스타 플라티니의 10번 셔츠를 물려받은 바조는 최고의 기량을 보여주며 세계적인 선수 반열에 오르게 되는데 이적 첫 시즌 총 26골을 넣으며 환상적인 활약을 보이기 시작한 바조는 이듬해 91/92 시즌 22골을 넣었으며 골을 비롯 어시스트에도 눈을 뜨게 되며 세계 최고의 9.5번 공격수로 활약한다 부상이 없는 바조는 마라도나에 버금가는 환상적인 드리블과 프리킥으로 세계 축구팬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며 승승장구하기 시작했고 골이 필요한 순간 절묘한 어시스트를 통해 동료들의 골을 어시스트하기도 했다
본인 커리어 최고의 시즌으로 기억될 92/93 시즌 리그 21골 UEFA컵 6골을 넣는 활약을 보이는데 특히 이 시즌 UEFA컵 결승전 도르트문트를 상대로 결승 1,2 차전 모두 골을 기록하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으며 본인 커리어 첫 번째 우승을 맞보게 된다 이러한 활약을 바탕으로 바조는 그 해 발롱도르와 피파 올해의 선수상을 석권하며 명실상부 세계 최고의 선수로 올라섬과 동시에 판타지 스타라는 수식어가 따라붙게 되며 이탈리아를 넘어 세계적인 아이콘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93/94 시즌 역시 모든 대회 22골을 넣으며 꾸준한 활약을 이어가지만 94/95 시즌을 끝으로 유벤투스와의 동행을 마무리하게 되는데 그 시즌 마르셀로 리피 감독이 유벤투스 감독으로 부임함과 동시에 바조 역시 부상으로 리그 17경기 8골을 기록하며 큰 활약을 보이지 못하게 된다 비록 바조 커리어 첫 번째인 리그 우승에 성공하지만 리피는 유벤투스의 떠오르는 스타 델 피에로를 중용하기 시작했고 이에 바조는 이적을 결심한다
AC 밀란, 볼로냐, 인터 밀란
화려한 실력과 반대로 바조는 감독들과 항상 불화설에 휩싸였는데 리피, 카펠로, 아리고 사키 등 세계적인 감독들과 마찰을 통해 옮겨 다니는 팀마다 큰 불화를 겪게 된다 유벤투스의 마지막 시즌을 마무리하고 바조의 이적 결심 후 레알 마드리드를 비롯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등 세계적인 클럽들이 그를 노렸지만 바조는 자국 리그인 AC 밀란으로 이적한다
이적 첫 시즌 카펠로 감독아래 28경기 7골 10 어시스트라는 스탯면에서 약간의 아쉬운 시즌을 보냈지만 본인 커리어 두 번째 리그 우승을 맛보게 되며 시즌을 마무리한다 비록 잦은 교체출전으로 카펠로 감독과 약간의 갈등은 있었지만 나름 좋은 관계를 유지했기에 두 번째 시즌 더 좋은 활약이 기대됐지만 카펠로 감독이 레알 마드리드 감독으로 옮겨 감에 따라 우루과이 명장 타바레스 감독이 부임하고 타바레스 감독 아래 바조는 수많은 경기 벤치에서 시작해야 했는데 그 시기 바조와 AC 밀란은 최악의 부진을 이어가게 된다
그렇게 팀 부진 속 타바레스 감독이 경질됐지만 하필 바조와 사이가 좋지 못한 아리고 사키 감독이 부임하게 되고 바조는 모든 경기 9골 8 도움에 그치며 시즌을 마무리한다 아키로 사키 감독 역시 시즌 종료 후 성적 부진으로 팀을 떠나게 되고 카펠로 감독이 다시 AC 밀란으로 복귀하지만 카펠로 감독은 자신의 플랜에 바조의 자리가 없다는 것을 알렸고 바조는 그렇게 다음 시즌 볼로냐 FC로 이적하게 된다
97/98 시즌 볼로냐로 이적한 바조는 기대 이상의 활약을 보여주는데 리그 30경기 22골 세리아 A 득점랭킹 3위라는 엄청난 활약을 보여주며 본인의 부활을 알렸고 동시에 1998년 프랑스 월드컵에 출전하게 된다
97/98 시즌 본인의 클래스와 98 프랑스 월드컵에서의 좋은 활약으로 다시 한번 빅 클럽인 인터 밀란으로 이적하지만 첫 시즌 부상으로 큰 활약을 보이지 못하며 리그 5골에 그치고 만다 비록 리그에서만 5골이었을 뿐 컵대회와 유럽 대항전에서 총 10골을 기록했지만 바조의 이름값에 비하면 저조한 활약이었고 호지슨 감독이 성적부진으로 시즌 아웃 또다시 바조와 사이가 안 좋은 리피 감독이 부임하며 많은 기회를 잡지 못하게 된다
바조는 인터 밀란 마지막 4경기 2골 1 도움을 기록하며 팀의 챔피언스리그 출전권인 리그 4위에 올려놓으며 이적하게 된다
브레시아 칼초
00/01 시즌 33살의 나이에 브레시아 칼초 유니폼을 입은 바조는 총 4 시즌 동안 선수생활 막바지를 화려하게 장식하며 아름다운 마무리를 하게 되는데 비록 팀은 강등을 걱정하는 약팀이었음에도 감독의 전폭적인 지지아래 바조는 꾸준히 득점을 하며 감독의 기대에 부응했고 적지 않은 나이에도 젊은 선수들에게 귀감이 되는 좋은 활약을 이어간다
첫 시즌 부상으로 시즌 막바지에 복귀한 바조는 두 달여 동안 리그에서 10골을 넣는 활약으로 팀을 최종순위 8위까지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으며 01/02 시즌 리그 8경기 8골이라는 놀라운 득점력을 보여주며 2002년 월드컵 최종 엔트리 발탁을 바라보게 된다 하지만 좋은 활약을 보여주던 찰나 또다시 무릎 부상을 당한 바조는 월드컵 출전 의지를 위해 3개월 만에 복귀에 성공하며 월드컵 출전 의지를 다지지만 또다시 부상이 재발하며 은퇴 위기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바조는 또다시 기적적으로 월드컵을 두 달여 앞둔 4월에 복귀하며 복귀전 20분 동안 2골을 넣는 엄청난 투혼을 보여주지만 당시 이탈리아의 트라파토니 감독은 바조의 몸상태가 완벽하지 않다고 판단 결국 월드컵 최종 엔트리에 제외되고 만다
그렇게 브레시아에서 남은 두 시즌 활약하며 두 시즌 연속 12골을 기록 마지막까지 클래스를 보여준 바조는 03/04 시즌 AC 밀란과의 리그 최종전 산시로에 움집 한 8만 광중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한 편의 영화 같은 축구 인생을 뒤로하고 그라운드를 떠나게 된다
국가대표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1990년 피오렌티나에서 좋은 활약을 이어 가던 바조는 자국에서 열리는 이탈리아 월드컵에 참가하게 된다 비록 서브 멤버였지만 예선 두 경기 선발 투톱의 부진으로 체코와의 세 번째 경기 선발 출전한 바조는 30M 단독 드리블 후 수비를 제쳐내며 환상적인 득점을 만들며 팀의 2:0 승리를 이끌게 된다 이러한 활약으로 남은 경기 주전으로 활약하며 팀을 4강으로 이끌지만 4강전 마라도나가 이끄는 아르헨티나에 승부차기 끝에 패하며 우승에 실패하게 된다
비록 우승에 실패했지만 잉글랜드와의 3,4위전 잉글랜드 수비진 세명을 속이는 환상적인 선제골을 넣으며 팀의 2:1 승리를 도왔고 팀은 그렇게 3위로 대회를 마감하게 된다
1994년 미국 월드컵
바조와 세계 축구팬들에게 영원히 기억될 1994년 미국 월드컵 바조는 유벤투스에서 명실상부 세계 최고의 선수로 성장하며 대회 최고의 스타이자 이탈리아의 에이스로 월드컵에 참가하게 된다
아일랜드, 멕시코, 노르웨이와 죽음의 조에 속한 이탈리아는 예선 3 경기 졸전을 보이며 1승 1 무 1패로 어렵게 16강에 진출하고 바조 역시 예선 3 경기 기대만큼의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며 무득점에 그치고 만다 특히 노르웨이와의 2차전 골키퍼의 퇴장 속 본인의 교체출전을 지시한 사키 감독의 결정에 욕을 하는 장면이 세계로 중계되며 큰 논란이 되기도 했다
16강전 나이지리아전 0:1로 뒤지고 있던 상황 바조는 경기 종료 막바지 극정인 동점골을 성공시키며 경기를 연장전으로 끌고 갔으며 연장전 PK 결승골을 성공시키며 팀을 8강으로 이끈다 강호 스페인과의 8강전 1:1 동점 상황 후반 경기 종료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 바조는 또다시 환상적인 골을 기록하며 팀을 4강으로 이끌었으며 4강전 불가리아전 역시 바조는 원맨쇼를 보여주며 25분 만에 홀로 두 골을 기록 팀의 2:1 승리를 도우며 팀을 결승으로 이끌게 된다 특히 첫 번째 골장면 그의 화려한 드리블과 예술적인 감아 차기는 세계 축구 팬들의 탄성을 자아내게 만들기도 했다
이탈리아 특유의 1점 차 승부가 지속되는 경기 속 바조는 토너먼트 5골을 기록하며 팀을 결승으로 이끌었고 팀이 중요한 순간마다 골을 기록하며 팀을 구해냈기에 미국 월드컵 최고의 활약을 보여준 선수는 단연 바조였고 바조를 위한 월드컵이라고 해도 무방한 대회였지만 브라질과의 결승전 마지막 승부차기를 실축하며 한순간에 거짓말 같이 영웅에서 역적이 되고 만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비록 에이스의 상징 10번 셔츠는 델 피에로에게 물려줬지만 볼로냐에서의 좋은 활약을 바탕으로 최종 엔트리에 오르며 참가한 프랑스 월드컵 델 피에로의 부상으로 예선 3경기 선발 출전한 바조는 칠레와의 첫 경기 환상적인 원터치 패스로 비에리의 득점을 어시스트했으며 경기 종료직전 PK 골을 성공시키며 팀의 2:2 무승부를 이끌었고 2차전 1 도움 3차전 1 득점을 올리는 등 여전한 클래스를 보여준다
비록 예선 3차전부터 델 피에로가 부상에서 복귀함에 따라 주전에서 밀려난 바조였지만 이탈리아는 16강 노르웨이전 한골에 그치며 저조한 득점력으로 1:0 승리한다 프랑스와의 8강전 역시 저조한 득점력으로 정규시간 0:0 무득점에 그치며 승부차기에 돌입하게 되고 프랑스와의 승부차기 첫 번째 키커로 나선 바조는 골을 성공시키며 승부차기 악몽에서 벗어나지만 팀은 또다시 승부차기 끝에 패하며 8강에서 대회를 마무리하고 만다
비록 팀의 에이스는 델 피에로였지만 델 피에로가 선발로 나선 3경기 부진한 경기를 보이며 바조를 계속 주전으로 썼어야 한다는 이탈리아 내의 비판의 목소리가 있었기에 바조에게는 94년 미국 월드컵 못지않은 아쉬운 커리어 마지막 월드컵 대회로 남게 됐다
글을 마치며
축구에서 위대한 선수를 칭하는 판타지스타는 득점력, 패스, 프리킥, 드리블 그리고 경기를 한 순간에 뒤집을 수 있는 특별함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리고 이 판타지스타라는 용어가 로베르토 바조에서 비롯됐을 만큼 그는 경기장 내에서 다른 선수들과 차별화된 특별함이 있는 선수였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로베르조 바조의 엄청난 팬이었다 로베르토 바조의 플레이를 보고 축구라는 스포츠에 더 빠져든 거 같다 그의 경기를 보기 시작한 시점은 그가 전성기에서 내려온 시점이었지만 바조의 플레이를 보고 있으면 축구라는 스포츠가 단 한 명의 선수만으로도 경기를 뒤집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준 선수였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런 화려한 축구 스타일과는 반대로 선수시절 내내 그를 괴롭혔던 부상을 이겨내고 그라운드에 복귀했으며 월드컵 승부차기 실패 후 자국의 모든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끝까지 일어나 선수생활을 했던 그의 의지가 너무나 멋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축구선수로 모든 것을 이룬 말디니는 이런 말을 했다 다시 태어나도 축구선수를 하겠지만 이왕 다시 태어나는 인생이라면 로베르토 바조로 태어나고 싶다고 선수 커리어와 우승 경력을 봐도 말디니가 더 화려한 경력을 쌓은 선수임에는 틀림없지만 동시대 같이 활약한 선수가 봐도 로베르토 바조만의 특별함이 있어서 그런 얘기를 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든다 현대 축구에 더 이상 바조 같은 판타지스타가 나오지 않겠지만 아직도 시간 될 때 그의 선수시절을 그리워하며 플레이 영상을 보곤 한다
필자와 동시대에 축구를 봤던 사람이라면 한 번쯤 로베르토 바조의 플레이를 그리워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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